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베를린 공방전 (문단 편집) == 배경 == [[1944년]] [[여름]]에 펼쳐진 소련군의 대규모 공세인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동부전선]] [[독일군]]의 주력인 중부[[집단군]]이 완전히 붕괴했고, 이에 따라 독일군은 [[벨라루스|벨로루시]]에서 철퇴하여 비스와 강을 경계로 소련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리고 곧바로 벌어진 소련군의 남부 공세 때문에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도 물러났고, 이때 독소전쟁 초기부터 [[독일군]]의 동맹국이었던 [[루마니아]]와 [[핀란드]]는 소련과 강화를 맺고 소련군 측으로 돌아서서 독일군을 공격했다([[라플란드 전쟁]]). 이러한 동부전선의 붕괴와 함께 설상가상으로 서부전선에서는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노르망디에 상륙하여]] 순식간에 [[프랑스]]를 해방시키고, 독일 본토로 접근했다. 소련군은 1944년 가을을 끝으로 공세를 중지하고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는 [[모스크바 전투]] 이후의 반격 작전과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강박감에 의해 [[공세종말점]]을 억지로 넘어가면서까지 진격을 고수하다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이끄는 독일군에 역습당해 참패하고 탈환한 영토를 다시 빼앗긴 전훈에 따른 것이었는데 문제는 히틀러가 이것을 가지고 전세를 오판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동부전선에서는 우리 독일군이 소련군을 패퇴시켰으니까 서부전선에서 영•미군만 패퇴시키면 독일은 다시 영토를 되찾을 수 있다.'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보급 문제로 진격이 둔화된 서부의 영미 연합군에 대한 [[아르덴 대공세|공세작전을 계획했다.]] 이것은 상당히 도박적인 작전이었는데 당시 [[기갑]] 웨이브로 무자비한 파상 공세를 펴던 소련군에 맞서고 있던 동부전선의 정예 기갑 부대를 빼내어 투입했기 때문에, 당시 동부전선의 총책임자였던 [[총참모장]] [[하인츠 구데리안]]은 히틀러에게 항의했다. 심지어 아르덴 대공세가 실시되기 전에 나치 독일의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마저도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동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할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슈페어는 일반인이라 군사적인 것은 잘 몰랐지만 동부전선은 중요했는데 히틀러의 전략은 동부전선의 방어를 포기하고, 서부전선에 올인한 셈이었으며 이게 성공했다면 제3제국의 수명이 조금은 더 연장될 수 있었겠지만 초반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제공권도 없이 보급을 노획으로 해결한다는 말도 안되는 전략을 가지고 움직인 독일군은 참패했고, 공세가 실패한 서부전선 뿐만 아니라 이미 붕괴된 동부전선에 더욱 더 거대한 전력 공백을 초래했다. 한편 독일군의 서부 공세에 당황한 서방 연합국은 압력을 덜기 위해 소련군에게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개시해 줄 것을 요청했고 소련군의 위력을 과시하고 싶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은 흔쾌히 이에 응해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는 한편 전쟁 종결의 거대한 상징이 될 베를린 점령의 영광을 소련에 넘겨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전쟁 기간 동안 서방 연합군이 입은 인명피해도 적진 않았지만 소련군 및 소련인들의 어마어마한 피해에 비하면 경미한 수준이었고, 서방 연합군의 지휘관들은 전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해 더 이상의 많은 희생자를 내고 싶지 않아했기 때문에 이에 동의했다.[* 서방 연합군은 이 결정을 통해 실리를 챙겼는데 소련이 단독으로 베를린에 입성했음에도 서베를린을 확보했다. 아무리 패망하는 나치라 할지라도 적국 수도에서의 시가전은 연합군에게도 어마어마한 피해를 강요할 것임이 당연했기에 연합군은 베를린의 영광을 차지하는 대가로 소련군이 대신 죽게 함으로써 자국 군인들의 인명피해를 막았다. 다시 말해,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 입성이라는 영광을 소련에 넘기는 대신 비교적 적은 피해로 서독은 물론 소련 점령지인 서베를린까지 차지하는 나쁘지 않은 결과를 이끌어낸 것이다.] 이러한 양측의 이해에 따라 베를린 공략은 소련군의 몫이 되었다. 독일 서부를 순조롭게 진격하던 서방 연합군은 베를린에서 약간 떨어진 [[엘베 강]] 인근에서 진격을 멈추었다. 이것이 유럽 전선에서 서방 연합군의 마지막 활동이었다. 이후 젤로 고지 전투 직전까지의 상황은 [[비스와-오데르 대공세]]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